칼럼
책 읽어주는 목사 ‘지혜와 운명’ _ 임용성 담당목사
2020.08.12상세 본문
[임용성 담당목사 칼럼]
책 읽어주는 목사 <지혜와 운명> / 모리스 마테를링크 저 / 아르테 / 온누리신문
이 책은 벨기에 출신으로 파랑새라는 희곡을 썼고 벨기에 역사상 노벨문학상을 유일하게 수상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쓴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물안개 가득한 새벽 호숫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어떤 경지에 와 있는 느낌을 받는다. 또한 현자 없는 세상에서 현자를 만난 설렘과 더불어 그 현자와 함께 영적인 경지에서 동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칼럼을 읽는 이가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가 현실로 어떻게 다가와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는 분이라면, 또 각박한 삶에서 따뜻한 지혜의 위로로 인해 아름다운 감성을 재충전 받고 싶은 분이라면, 오늘 망설이지 말고 서점을 들르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 같은 문장 하나 하나와 깊이 교제해 보시기를 권한다.
작가는 이 책에서 지혜는 이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보다 우리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갈망과도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혜는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은 지식을 추구한다. 그리고 지식을 통해서 지혜가 자라는 것이라고 교육받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착오이며 착각이다. 왜냐면 지혜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바라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혜는 배움의 결과가 아니라 바라봄의 결과이다.
지혜와 지식은 어떤 간극이 있나? 예수님과 소크라테스가 간통한 여인과 마주쳤다고 가정해 보자! 소크라테스의 지성과 이성을 가진 자들은 여인에게 모두가 동일한 수치의 문제를 지적할 테지만 예수님의 지혜는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정의를 넘어서 선의를 낳을 수 있고, 그 지혜는 고로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지혜는 사물을 바라보는 힘이고, 사물을 유지하는 힘이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시각이며 사랑의 실천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지혜는 이성의 꽃이 아니라, 사랑의 화분이라고 이야기한다. 얼마나 공감이 되고 멋진 말인가?
그렇다. 현명한 사람은 멀리 내다볼 뿐 아니라, 동시에 깊이 사랑하고 품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 없이 본다는 것은 어둠을 더듬는 것과 같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도전하기를 우리가 언제나 위대한 발견을 앞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전존재를 열어 그 발견을 끌어안을 날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묵상을 해보았다.
첫째, 지혜는 ‘나를 바라보는 태도‘다. 행복은 나의 전 존재를 힘껏 안을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결코 외부로 부터 오지 않고 내 생명 안에서 존재한다.
둘째, 지혜는 ‘삶속에서 하나님을 확장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 확장은 오로지 나의 존재를 축소함을 통해서만 온다. 약할 때 강함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가 나의 삶에서 확장되려거든 축소의 영성, 겸손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셋째, 지혜는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모시는 것만으로는 영혼에 날개를 달 순 없다. 예수님처럼 사람이 되셔서 사람과 접촉하시므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결국 가장 신적인 모습이 됨을 보여주셨듯이, 우리의 삶의 태도가 사람이신 예수님의 소통과 섬김을 닮아갈 때 비로소 날개를 달 수 있다.
넷째, 지혜는 ‘삶의 희노애락속에서 건축자처럼 살아가는 태도‘다. 우리의 인생은 슬픔과 환멸, 회한을 피해갈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것에 좌절하기보다 그 폐기물 같은 것 속에서 야무지게 단련된 벽돌을 골라내자! 그리고 그것을 건축자재로 삼을 때 세상 어떤 환멸, 회한이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집을 지을 수 있다.
이 책은 200페이지 남짓 밖에 안되는 분량이지만 책이 주는 감동에 읽기를 멈추고 묵상해야 하는 시간은 수 백 번이 넘을 만큼 많은 인사이트를 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짧은 지면에 어리석은 자가 쓴 소개를 보고 이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혜는 생명을 움직이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 지혜를 갈망하자.